10만 빈곤어르신, 어린이 생계지원 무산(조선)
서울 관악구에서 혼자 사는 김모(68) 할머니는 동네 교회, 복지단체 등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가지만 국가에서 도움을 받지 못한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손자(26)가 부산에서 생활하며 약 120만원의 월급을 받기 때문이다. 부양은커녕 거의 만나지도 못하는 손자가 ‘부양의무자’로 간주되고 있어 K할머니는 정부 지원을 받는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에서 제외돼 있는 것이다.
최근 할머니는 동사무소 직원으로부터 “새해부터는 생계보조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부양의무자’ 범위에서 손자는 제외하는 내용의 법안이 통과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회가 작년 말 이 법안에 대한 심사 보류를 결정하면서 할머니의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고, 올해도 주위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가야 할 처지가 됐다.
최저생계비(1인 가구 기준 36만원) 이하의 소득을 벌면서도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는 노인과 어린이 10만여명에 대해 생계비 일부(올해 기준 1400억원 규모)를 지원하려던 계획이 예산당국과 국회의 반대로 무산됐다.
주민등록서류상 손자녀나 조부모 등의 부양가족이 있는 상황에서 국가가 생계에 도움을 주면 ‘도덕적 해이’가 생긴다는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을 지원할 예산도 없다고 기획예산처는 설명했다.
5일 기획예산처와 보건복지부 등에 의하면 국가가 생계비 일부를 지원하는 최저빈곤층(기초생활수급자)의 기준에서 ‘부양의무자’ 범위를 축소하는 내용을 담은 ‘기초생활보장법(기초법)’ 개정안에 대해 국회 법사위가 작년 말 심사보류를 결정했다.
현행법상 직계혈족(조부모·부모·자녀·손자녀 등)과 그 배우자(며느리·사위·손자며느리 등)가 일정 기준 이상의 소득이 있으면, 본인의 소득이 아무리 적어도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소년소녀 가장, 독거노인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들의 조부모나 손자녀가 약간의 소득이 있다는 이유로 국가가 도움을 외면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부양가족 범위에서 조부모와 손자녀를 빼는 것을 골자로 한 기초법 개정안이 최근 여야의원들에 의해 제출됐었다.
복지부 당국자는 “최저생계비도 못 버는 데도 부양가족(조부모·손자녀)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에서 탈락한 어린이와 노인들이 전국적으로 약 10만명”이라며 “이들에게 오는 7월 이후 생계비를 지원하는 데 약 14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순천향대 사회복지학과 허선(許 ) 교수는 “이들 10만명의 노인·어린이들은 근로능력도 거의 없고 최저생계비도 못 버는 상황”이라며 “주민등록상 조부모·손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국가가 외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회 법사위와 기획예산처는 “부양의무자의 범위에서 조부모와 손자녀를 뺀다면 가족해체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게 되고, 전통적인 가족관계의 동질성도 해칠 것”이라고 반대하고 있다. 특히 기획예산처 당국자는 “이들 10만명에게 지원할 예산 1400억원에 대한 여야 간 합의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밝혔다.
허선 교수는 “국회와 예산당국이 정당지원금이나 지역구 사업예산은 경쟁적으로 수천억원을 늘려놓고서, 정작 빈곤층에 대한 예산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 속셈만 차리겠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박용근기자  ykpark@chosun.com )
2004년 1월 5일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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