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문고 20년째 꾸려…이웃들도 후원 회 결성
지난 2일 오전 전북 김제시 신풍동 부영 3차 아파트 주차장.
'미래를 여는 이동 도서관'이라고 써붙인 1t 트럭에서 어머니와 함께 어린이들이 열심히 책을 고르고 있다. 도서관 운영자는 1급 시각장애인인 오윤택(吳潤鐸.44)씨. 30cm 정도 떨어진 물체의 희미한 윤곽만 볼 수 있는 그는 마을 후배인 손정권(31)씨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12월 26일부터 이동 도서관을 열었다. 그는 매일 1천5백여권의 책을 싣고 김제 시내 아파트 단지와 공원.쉼터 등을 찾아다니며 한 사람에게 세권씩 열흘 동안 무료로 책을 빌려주고 있다.
"한번도 밝은 세상을 본 적이 없지만 어린이들에겐 밝은 미래를 열어주고 싶어요."
선천성 장애인인 吳씨가 이런 소망을 품고 실천에 나선 것은 20년 전. 태어나면서부터 눈에 이물질이 끼는 각막 포도염을 앓던 그는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생업에 나서야 했다. 전국 각지의 버섯.미역공장과 염전에서 막노동을 하던 그는 1984년 무릎과 허리를 다쳐 고향인 김제시 성덕면 남포리로 돌아왔다.
"당시 마을 앞산에 텐트를 치고 살면서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삶을 마감하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자신처럼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예비군 중대본부 한모퉁이를 빌려 마을문고인 '남포문고'를 열었다. 그는 군청.농촌지도소 등을 찾아다니고 출판사에 편지를 보내 책을 기증받거나 남아도는 책.걸상을 지원받았다.
처음엔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설친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동네 사람들도 자녀들이 남포문고를 애용하자 협조자로 바뀌어 갔다. 이제 동네에선 吳씨를 "남포의 상록수"라고 부르며 후원회까지 결성해 회비를 모아줄 정도다.
그가 온 정성을 쏟은 덕분에 남포문고는 현재 1만5천여권의 책을 보유해 농촌 마을문고로는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남포문고는 변변한 문화적 혜택을 못 받는 농촌 학생들에겐 독서실.공부방이, 마을 6백여 주민들에게는 사랑방 겸 컴퓨터를 배우는 문화센터가 되고 있다.
김제=장대석 기자<dsjang@joongang.co.kr>, 사진=양광삼 기자
*** 후배가 띄우는 편지
"형님을 처음 만난 게 벌써 20여년 전이었지요. 형님이 고향에 내려와 마을문고를 열었을 때 저는 코흘리개 초등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마을문고는 당시 시골 아이들에게 '집이자 학교'였습니다. 처음에는 만화나 동화책을 보기 위해 시간만 나면 달려갔지만 중.고교 시절에는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독서실이자 온갖 고민을 털어놓는 상담소였습니다. 형님은 우리들이 진로 문제로 고민할 때면 떠돌이 경험 등 속깊은 얘기를 들려주며 진지하게 상담을 해주곤 했지요. 친구들과 화투짝을 만지다 형님한데 들켜 눈물날 정도로 엄한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는 어려운 환경에서 불우한 이웃을 돕고 마을문고 지원활동에 앞장을 서는 것은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형님의 모습에 반해서입니다.
새해에는 형님의 눈이 되어줄 마음 착한 반려자를 만나 알콩달콩 행복을 엮어가는 모습을 보았으면 합니다."
손정권
중앙일보 2004년 1월 7일 9사회면 2004 희망이야기